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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까마귀는 내려앉고.

  • 2019.09.26 13:13
  • 조회수186

양피지 위를 움직이는 조용한 깃펜 소리만이 어두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방을 밝히는 것은 전혀 없다. 빛이라고는 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작은 불빛뿐이었다. 

만약 이 사각이는 깃펜 소리마저도 없었더라면, 이 공간에 누군가 있는 것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문 틈새로 비추어지는 빛에 나지막히 드러나는 거대한 까마귀 모양의 벽 장식은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구태여 설명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이 브리크리덴의 밤을 지배하는 까마귀는 언제나 단 하나. 


‘레이븐’이라 불리우는 오직 그녀 단 한 명 뿐이었으니까.


“하아…”


그러나 레이븐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그놈의 예언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며칠 전, 대예언자 세다크가 한 예언.

결국 전부 그게 문제였다.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 좋다. 


영웅들을 모으는 것? 그것도 좋다.


좋은 게 좋은 것이지, 좋은 일 한다고 탓할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시기였다.


“굳이 나서서 일 크게 벌리지 않아도, 이미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레이븐은 입술을 악물며 탁상을 쾅, 내리쳤다.

위브릴 왕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런 정보는 방구석의 마법사나 예언자가 아니라, 언제나 새와 쥐가 먼저 듣는 법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전쟁은 언제나 돈이 되기에, 위브릴과 그 주변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 한 물밑 작업이 몇 달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마계의 문? 물론 위협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까마귀들이라고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레이븐을 위시로 까마귀들은 각국의 세력, 지형, 전황들을 가지고 나흘 밤낮을 계산했고, 

결국에는 마계의 문에서 무엇이 나오든 브리크리덴과 케임드웨이브 사이에서 멈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희생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브리크리덴과 나우르는 그것을 복구할 충분한 여력이 있을 테니 이제 남은 것은 그 사이에서 줄을 타며 전장을 조율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소집령이라니, 팔자도 좋군…!”


실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대처였다.

차라리 다른 왕궁과 신원이 확실한 영웅들에게만 은밀히 사자를 보내 소집시켜야만 했다.

지금 온 대륙의 정세가 어떤지 그가 알기나 할까. 온갖 종말론이 떠돌고, 피난한다는 사람들이 즐비해 정보 수집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에 관심이나 있을까.


“후우…”


그녀는 미간을 꾹꾹 짓누르며 신음을 흘렸다.

평소라면 결코 흥분하지 않았을 그녀였지만,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사흘이나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서류만 마주하고 있으면 피로가 쌓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삐걱이는 경첩음과 함께 그녀의 방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레이븐! 급보입니다!”


“물론 급보겠지. 그래, 이번엔 뭐지? 케임드웨이브의 왕이 급사라도 했다던가?”


이 망할 상황에 급보가 아닌 게 있겠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삼켜내곤, 사내가 가져온 편지를 받아들었다.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전혀 반갑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급보랍시고 올라오는 소식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에게 ‘급보’라고 하며 전달될 만한 소식은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지방에 숨겨진 금광이 발견되었다.’


‘어디 영지의 영주가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전설 속에서만 전해져오던 무기가 어디어디 던전에 있다는 정보다.’


이 따위 소식들은 그녀에게까지 전해지지도 않는다.

큰까마귀(Raven)의 방에 급보랍시고 전해지는 것들은, 마땅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 뿐이었다. 


까마귀 둥지의 수장이란 것은 그만큼 시간이 없는 존재였고, 다른 까마귀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아…”


짜증을 감춘 표정으로 사내로부터 문서를 건네받은 레이븐은 익숙한 문장의 봉인에 금새 인상을 찌푸렸다. 

세 자루의 검이 교차하는 황금빛 봉인.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는 문장이었다.

제국의 사람들 중에 이 문장의 봉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이건 또 뭐야.”


레이븐은 안 그래도 예언 때문에 흉흉해서 바쁜 시기에, 번거로운 일이 하나 더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레이븐은 망설임 없이 봉인을 뜯어버리곤 그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어둠 속이지만, 고작 그런 것은 그녀에게, 그리고 그녀의 까마귀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맹수의 그것과도 같아 보였다.


“성가시군…”


편지를 대충 훑은 레이븐은 그것을 책상 위에 대충 던지며 의자 뒤로 목을 젖혔다.

피곤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덤까지 추가로 왔다.

까마귀가 지금껏 각 왕국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가장 큰 고객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이유라 하면, 귀족의 비밀은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비싸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는 종이쪼가리일 문서조차, 귀족들의 치정 싸움에서는 성 하나, 영지 하나가 오갈 정도로 큰 거래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귀족들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단연 까마귀의 왕이다.

레이븐은 그런 자들 사이에서 막대한 이익을 낳아 왔고, 왕국과의 거래도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위대한 ‘제국’께서 직접, 이라…’


황실과의 거래가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황제의 직인은 몹시 드물었다. 

황실이 까마귀의 도움을 받았다고 광고해서 좋을 일이 무어 있겠는가. 

설령 황제의 직필 편지가 온다고 해도 그것에 직인이 찍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것이 눈 앞에 있었다.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십니까?”


사내는 눈썹을 추켜뜨며 말했다.

본래 레이븐에게 이러한 기밀에 대해 물어서는 안 되었으나, 이번에는 그도 몹시 궁금했다. 

수십년 동안이나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 없는 자신의 보스가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토록 뚜렷한 반응을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레이븐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한 일이었고, 예상한 일이었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행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레이븐은 편지를 품에 넣고는 벽에 걸려 있던 자신의 로브를 뒤집어썼다. 

조금 먼지가 일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 문제 없다.


“허턴.”


“예, 레이븐.”


허턴이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 

까마귀들에게 레이븐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더군다나 이름을 부르면서 하는 명령이라면,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완수해야 할 일이기에. 

허턴은 레이븐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출장 좀 다녀오마.”


“예…예?”


허턴은 벙 찐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잘못 들은 것인지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집 잘 지키고. 모르는 사람 문 열어주지 말고.”


“그, 그 정도는 압니다. 그러나…!!”


까마귀들의 왕이 출장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레이븐은 찾아가는 자가 아니다. 맞아들이는 자이다.


지금까지 그러했고, 그것은 어떤 나라의 왕족이라도 변하지 않았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체 그 편지가 무슨 내용이었길래 이러는 것일까.


수많은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그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허턴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레이븐.”


레이븐의 명령은 절대적.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 것이다.

그럴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


어두운 그림자 속, 나직히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허턴은 그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볼 수 없어도 충분했다. 그녀의 대답 한 마디면 모든 것을 완수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찰나가 지나고, 다음 순간 허턴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의 체취만이 그림자 속을 맴돌고 있었다.


#르미에 #PC #공모전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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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 2019.09.26 13:26
    우어어어어아 대박이다 그러네요 분명히 위브릴이 문을 열기전, 이를 예측하던 세력이 있었을거에요..!!
  • 2019.09.26 13:22
    뭔가 너에게서 박력이란거가 느껴져. 인간맞아?
  • 2019.09.26 13:22
    저 엄청나게 박수쳤어요... 앤으로말해야하는걸 잊을정도로..
  • 작성자 2019.09.26 13:22
    *수정했습니다 :)
  • 엄청난 필력이시군요. 엄청난 값어치의 이야기입니다. 수상을 목표로 하신다면 제목에도 [공모전]을 넣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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