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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옛날(1)
- 2019.10.24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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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꼬마가 집을 벗어나고, 늙은 집사가 돌아온 지 몇 시간이 지나고, 온 몸이 붕대와 거즈투성이인 제인은 침대에 앉고는 새로 산 책을 읽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흑장미는 그가 벗어놓은 모자에 앉아 옆에 있던 물컵에 뿌리를 넣었다. 장미는 완벽히 제 악에 망가진 그가 마음에 들었다. 완전히 검게 물들진 않았지만, 순수했던 선홍색의 마음이 검붉은 흑장미처럼 녹아 뚝뚝 떨어지는 불안전한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속의 무언가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흑장미는 그가 아직 자신의 존재도 몰랐던 그때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가 제인을 처음 만난건 수십년 전, 제인이 9살 어린이였을 때였다. 그는 붉은 달이 뜬 날 밤,6월 16일에 태어났다. 한창 저주받을 운명이라는 신부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모는 그를 사랑으로 키웠다. 그의 아버지는 존 레옹 레그로피르. 위브릴의 숨겨진 위대한 연구가이자, 아르노셀 연합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늘 바빠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꽃집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지냈다. 자연스레 꽃과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제인은 다른 어린이들처럼 친구와 놀거나 놀이터에 가는 대신, 위브릴에 외진, 푸른 얼음꽃들이 만개한 자신의 비밀장소에 갔다. 얼음 결정이 비치는 꽃잎이 노을 하늘을 가득 담아, 마치 거울이 있는 듯한 꽃밭의 풍경을 제인은 매일매일 바라보았다. 제인의 나날은 그곳이 시작이자 끝이었다. 항상 그의 어머니는 제인이 어딜 가는지 알고싶어했지만, 그녀는 자유로운 어머니였다. 그래서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그녀의 자유로움이 제인의 일생을 바꿔놓을 줄은.
어느 날, 제인은 자신이 늘 가던 꽃밭에서 흑빛을 띈 덩굴을 발견하였다. 얼음꽃들 사이에 놓인 검은 꽃봉오리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결국 흑장미에게 관심을 붙이기 시작했다.
"안녕, 넌 이름이 뭐니?"
"이거 봐! 내가 그렸어!"
"저기, 오늘은 말야~..."
눈밭이 춥지도 않은 지, 꽃봉오리 옆에서 제인은 자기 이야기를 하며 온종일 꽃밭에서 떠들었다. 위브릴에 봄이 찾아오자, 어머니가 병에 걸려 제인은 당분간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여러 의사들에게 거금을 줄 정도로 아내를 살리기에 연연했던 아버지는 결국 그의 아들과 함께 그녀의 최후를 눈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혹한을 간신히 견딘 작은 잎새들이 돋아날 동안 제인은 한껏 우울해진 채 어두운 방구석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한참을 나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됬지만, 나라에서 들어온 공문 때문에 오랜시간 집을 비워야 했다. 제인의 어두운 암흑기동안 그를 구원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인이 가지 않은 꽃밭에는 투명한 꽃 대신 파릇파릇한 잔디들이 이슬을 머금고 올라오고 있었다. 얼음꽃이 녹아 그늘이 사라진 꽃밭에 꽃봉오리가 움찔댔다. 점점, 날이 갈수록 흑색의 줄기는 갈수록 거대해져 곧 꽃밭은 덩굴밭이 되어 날카로운 가시를 갈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커다란 꽃봉오리가 조금씩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꽃의 안쪽에 검은 그림자가 눈을 떴다. 눈부신 햇살에 긴 잠에서 겨우 눈을 뜬 레드로즈는 바깥으로 나왔다는 증거인 태양을 보았을 때 슬며시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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