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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당신의 곁에 있어도 될까요? - 7. 예정된 만남 -
- 2019.10.1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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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석양의 주홍빛을 받으며, 말을 탄 사나이가 프로페티사룸의 작은 도시, 인둘젠티아의 중앙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붉어진 흰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의 흰 말 또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은 땀과 바람에 심하게 헝클어져 있었고, 피곤했는지 눈빛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그런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의 주변에서 나는 피비린내 때문이었을까,
거리의 사람들은 그를 피해 집골목 사이사이로 몸을 피했고, 거리의 집들은 그 창문을 닫았다.
그가 중앙광장에 다다르자 하루를 마무리하며 시끌벅적했던 광장은 어느새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는 중앙광장 분수대 앞에 멈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분수대에 앉아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말을 타고 가까운 종교 시설로 들어갔다.
이윽고 건물 내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시오. 우리는 당신 같은 자를 들여보낼 수 없소.”
아주 엄중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 말을 탔다.
말을 타고 마을을 떠돌던 사나이는 이내 한 식료품 가게에 들어갔다.
“어서오세.. 으악!”
손님맞이 인사를 하던 식료품점 주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고기를 사고 싶은데요.”
“으악! 사람 고기는 팔지 않아요!”
“돼지고기입니다.”
“아, 아무튼 오늘은 더 이상 팔 것이 없어요! 이미 저녁이잖아요!”
“그럼 저건 뭡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판매대에 남아있는 고기 한 덩어리를 가리켰다.
“저건... 제가 먹을 거예요! 팔 거 없으니 나가요!”
식료품점 주인이 소리쳤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식료품점을 나섰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뭔가 생각해낸 듯, 말을 타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도시의 강가였다.
그는 강변에 서서 우선 자신의 말에게 물을 뿌리며, 말에게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한참 말을 닦고 있는데 한 사나이가 허겁지겁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고!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거요!”
그가 사나이를 쳐다봤다.
“말을 씻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씻긴 후엔 제 갑옷도 닦을 생각입니다.”
그러자 사나이가 손을 빠르게 가로저었다.
“아이고, 여기서 그런 짓을 하면 어쩌라는 거요!”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디서 닦으라는 겁니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 강에서는 피를 닦으면 안 되오!”
“다른 건 됩니까?”
“그렇소, 피만큼은 안되오!”
사나이가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었다.
그건 아마도 이 강과 관련된 종교 때문이리라.
“그럼 어디서 닦을 수 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안되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곤, 다시 말을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그는 아직 땅거미가 지고 있건만, 마치 한밤중인 것처럼 돌아다니는 자 한 명 없는 도시를
배회하다 인근 숲으로 들어갔다.
숲속에서 그는 흰 바위에 앉아, 달빛을 받으며, 짐에서 풀줄기를 몇 개 꺼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뒤에서 수풀을 헤집는 소리가 났다.
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며 자신의 검을 검집에서 뽑아 들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평안하신지요.”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순간 놀랐으나, 경계를 풀지 않고 상대를 노려봤다.
“인둘젠티아는 평화롭지요. 어떠셨나요?”
그녀는 아무런 적대감을 띠지 않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는 상대에게 공격 의사가 없음을 느끼곤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사람이 아예 없는 곳으로 착각할 정도였죠.”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그건 과장이네요.”
그가 물었다.
“당신은 제가 두렵지 않습니까? 이렇게 피투성이인데도?”
“신께서 저를 보호하고 계시는데, 어찌 제가 당신을 두려워하겠어요?”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사제님이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실례랄 것도 없어요. 저는 그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여종이자 딸일 뿐인걸요.”
그녀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어두운 그늘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비친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어깨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걸음에 맞춰 찰랑거렸다.
맑고 투명한 피부가 달빛을 반사했으며, 짙은 푸른 눈은 호수와 같이 깊었다.
걸음걸이 또한 얌전함과 정숙의 표본으로, 우아함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소개해 드리지요. 저는 ‘안젤린 드 터일’이라고 합니다.
일신교 사제이고, 현재 치유 봉사를 나와 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
그는 그 목소리에 취해있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저는...”
그녀가 말을 끊곤,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맞춰볼까요? 당신은 윌리엄. 핑귀시아의 자경단원이죠.”
윌리엄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걸 어떻게......”
“당신은 모터산으로부터 여기까지 말을 타고 왔지요.
오는 길에 여러 마을을 공격하는 도적단들을 와해시켰죠.
그리고 직전에는 인둘젠티아를 습격하려는 도적단을 기습해 무너뜨렸죠.
그리고 그때 묻은 피가 지금 당신의 몸을 뒤덮고 있는 피예요. 틀린가요?”
윌리엄의 눈이 떨리고 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만...”
안젤린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은 신께서 수년 전부터 말씀해주신 바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 여동생을 고쳐줄 분인가요?”
안젤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쉽게도 그건 저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윌리엄의 표정이 굳어갔다.
안젤린이 말을 이었다.
“당신의 여동생이 나을 방법은 단 한 가지뿐 입니다.”
윌리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안젤린은 진지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뱀의 꼬리를 잡으세요.”
그 말을 들은 윌리엄은 한숨을 쉬었다.
기껏 프로페티사룸까지 왔건만, 들은 말이라고는 뱀의 꼬리를 잡으라는 것.
대체 뱀은 뭐란 말인가.
윌리엄은 답답함에, 가지고 있던 풀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모습을 본 안젤린이 말했다.
“그 풀은... ‘렌네프’... 굳이 드셔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요?”
“식량이 다 떨어져, 가진 풀이라도 먹고 있습니다.”
안젤린이 윌리엄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저를 따라오세요. 제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윌리엄이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마을 사람들은 집에 저를 들이길 싫어합니다.”
안젤린은 멈칫하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렇다면 말에 태워주시겠어요? 저의 집까지 가도록 하죠.”
“저랑 붙어 앉으시면 옷에 피가 밸 텐데요...”
윌리엄은 안젤린이 입고 있는 새하얀 사제복을 훑어보았다.
“옷은 빨면 되는 것입니다. 자, 어서 가시죠. 갈 길이 멀답니다.”
윌리엄은 어쩔 수 없이 안젤린을 자신의 등 뒤에 태웠다.
윌리엄이 물었다.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전속력으로 달리면 2시간 반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서쪽 게레치트호로 가주세요.”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윌리엄의 눈앞에 달빛을 찬란히 반사하는 거대한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인가요?”
“예, 맞습니다. 저기 보이는 방향으로 가시면 나루터가 있을 거예요. 그곳으로 가주세요.”
“배도 타야 합니까?”
“예, 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저는 터일섬 출신이기에...”
윌리엄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지도에서 터일섬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호수 위의 섬...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죠.”
안젤린이 웃었다.
“지도상에서는 커 보일지 몰라도, 실제론 매우 작은 섬이랍니다.”
“어느 정도 크기의 섬인가요?”
“둘레가 400m입니다.”
“아담하네요.”
나루터에는 나룻배가 서너 척 있었다.
윌리엄은 그중 가장 큰 나룻배를 골라 자신과 말, 그리고 안젤린을 태웠다.
안젤린이 물었다.
“아까 배가 고프다면서 드셨던 풀은... 일부러 그 풀을 고르신 건가요?”
“아뇨, 그냥 가진 풀 중에 아무거나 집어서 씹었습니다.”
윌리엄은 약초 보따리를 들어 안젤린에게 보여주었다.
“역시나 그러셨군요.”
안젤린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이상해 보였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네요. 왜냐면 그 풀은 아기를 가진 어머니들이 먹는 약초거든요.
효능은 최유제예요. 즉, 모유가 적게 나오는 어머니들을 위한 풀이죠.”
“아...”
“물론, 체중감량 효과도 있긴 합니다만... 윌리엄 씨에게는 필요 없는 효능이니까요.”
“안젤린씨는 약초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안젤린이 가볍게 웃었다.
“알고 계시다시피, 교회는 온갖 학문이 모이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니까요.”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안젤린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기에, 섬에는 연구용으로 다양한 풀이 심겨 있답니다.”
윌리엄이 ‘과연, 과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이 물었다.
“그럼 터일 섬에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까?”
안젤린이 얼굴에 미소 띤 채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아니요. 현재 저 섬에는 저와 제 딸만 살고 있습니다.”
윌리엄이 깜짝 놀라 외쳤다.
“자녀가 있었습니까?!”
안젤린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제 나이도 이제 33세입니다만...”
“예?!”
“그렇게 놀라실 필요까지는... 확실히 제가 앳되어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영락없이 20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안젤린이 웃으며 말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요.”
“그렇다면 따님은 꽤나 어리겠군요.”
“아마 윌리엄 씨 또래가 아닐까 싶네요.”
“아?”
“제가 16세 초에 결혼했으니까요.”
“16세 때 결혼하시고 바로 낳으셨다면, 현재 16세 정도 되었겠네요.”
안젤린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확합니다. 이제 딸도 결혼을 하게 되겠지요.”
“그렇네요... 어... 눈여겨봐 두신 남성이 있나요?”
안젤린은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결혼할 대상은 신께서 정하시는 것, 제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젤린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윌리엄 씨는 결혼할 대상을 찾으셨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
윌리엄은 점점 대화 주제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느끼곤 주제를 바꾸고자 했다.
“그건 그렇고, 안젤린 씨께서 여기 계신다는 건, 지금 섬에는 따님만 있다는 것 아닙니까?”
“네, 말씀대로 입니다. 그녀가 지키고 있습니다.”
윌리엄이 조심히 물었다.
“어린 여자 혼자서 지키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은가요?”
안젤린이 걱정 말라는 듯,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린 여자 혼자가 아닙니다. 신께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윌리엄은 이해가 되질 않아 재차 물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보면 혼자인 것 아닌가요..? 말하자면 신의 가호를 입은 소녀 한 명.”
안젤린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의 윌리엄 씨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현재 그녀는 그 누구보다 안전합니다.”
윌리엄은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말싸움이 될까 싶어 그냥 수긍하기로 했다.
그리고 윌리엄은 대화가 혹 끊길까 봐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이 나룻배밖에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때문에 비가 심하게 오는 날엔 섬에 오갈 수 없죠.”
“그렇다면 다리를 만드는 것이 좋지 않나요?”
안젤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싫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칼 같은 거절에, 윌리엄은 민망함을 느꼈다.
얼마나 민망했던지, 윌리엄은 말을 버벅대기 시작했다.
“시, 싫으시군요. 네.. 그럴 수.. 그럴 수 있죠.. 네...”
안젤린이 한숨을 쉬곤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꽤 민감한 문제이기에, 저도 모르게 그만 매정하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윌리엄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어휴,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죠.”
윌리엄은 왜 다리 건설을 그렇게 꺼리는지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윌리엄이 훗날 추측한 이유는,
그 호수는 일신교의 교회가 있는 터일섬과 외부 세계를 단절하는 일종의 방어막 같은 역할이었으며,
안젤린은 이를 이용해 교회가 외부와 섞이며 변질될 가능성을 없애고자 했던 것 같았다.
물론, 이 또한 윌리엄의 추측이기에 정확히 왜 안젤린이 그 호수에 다리를 짓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새 나룻배는 터일섬에 도착했다.
터일섬에는 큰 교회 하나와 그 부속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 큰 교회의,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검은 지붕들, 하늘로의 상승감을 느끼게 하는 수직의 기둥들,
그리고 크고 작은 창문들과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웅장한 모습은 윌리엄으로 하여금
인간의 신에 대한 충성심과 신을 향한 인간의 열망 등 압도적인 신앙적인 감정들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교회의 모습에 압도당해있던 윌리엄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대단히 웅장하군요.”
안젤린이 미소를 지었다.
“가끔 너무 과하지 않냐는 말도 듣곤 합니다만,
저는 집이나 궁전과 같은 자기 공간은 멋지게 지으면서,
신의 공간인 교회는 대충 지으려는 건 큰 죄라고 생각한답니다.”
윌리엄은 안젤린의 말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큰 건물이 예배당이면, 안젤린 씨는 어디서 사시는 건가요?”
“저 주변의 부속 건물 중에 집도 있답니다. 물론, 예배당 깊숙이 있는 방에서 지낼 때도 있긴 합니다.”
“그렇군요.”
안젤린은 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저 방문자용 목욕탕에서 씻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갑옷은 호수에서 닦아야 하겠지만요.”
“아, 감사합니다.”
“다 씻으시면 예배당으로 와주세요. 그때까지 저는 기도를 드리고 있겠습니다.”
“아, 네!”
안젤린은 윌리엄을 목욕탕으로 안내한 뒤, 그대로 예배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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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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