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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이의 기록

  • 2019.09.29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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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브릴


손이 저절로 움직여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내 의지에 의해 쓰인 글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현실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초월적 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이란 결국 덧없는 환영들의 총합이 아닌가? 모든 것이 허상과 같으며 눈 한번 감았다 뜨는 사이에 걷어치워질 의식의 허황된 반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내게는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일체의 사물이란 결국 거대한 허무로부터 비롯된 망령된 허상의 일시적 조화로서 있을 뿐이며 최후에는 끝내 본연의 무로 되돌려지고 말 것이다.

내가 학술원에 소속되어 심연의 힘에 관한 연구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돌이켜보면 순전히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관에 소속되고 매일 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내가 자의로 한 일은 무엇도 없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심연의 힘을 응축시켜 그를 관찰하기 위한 구체를 중심에 둔 어둑한 실험실에서 나날을 보냈던 것은 결국 나의 의식을 조작한 다른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끌어들이며 벌어진 일이라고 봐야 할 일이리라.

누군가는 대륙을 지배할 권력에 대해 말하고 다른 누구는 적대세력에 파멸을 불러올 막대한 힘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두가 허황된 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이 모두가 심연과 허무의 영역에 숨은 초월적 힘이 만든 환영에 지나지 않을진대 누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얼마쯤의 권세며 명성을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결국 우리가 결코 가 닿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차원에 있는 절대적인 누군가가 만든 꿈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며 우리의 일생은 그의 의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헛되이 버둥거리나 결코 벗어날 수는 없는 채로 망령된 생애를 이어나간 끝에 결국 저항할 수 없는 채로 스러져갈 운명에 놓일 뿐인 것이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해될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내 의식을 지배한 채 영영 귓가에서 울리고 있는 목소리. 목소리는 머잖아 닥쳐들 최후를 예고하고 있다. 뜻을 알 수 없으나 생생한 현재로서 다가들고 있는 환상을 통해 나는 전언의 내용을 알아차릴 수 있다. 구체 앞에 선 내가 번져든 어둠에 휘말려 사라져가는 순간을 나는 본다. 초월적 힘은 결국 나를 집어삼켜 내 보잘것없는 일신마저 그의 손아귀에 넣고 말 모양이다. 불확실하게나마 자신에 대해 얼마간 인식한 인간에 대해 흥미가 동해 잠시 가지고 놀 놀잇감으로는 썩 괜찮으리라고 여기는 상대의 악의어린 의도가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결국 이 기록마저 증발해버리고 말 것임을 잘 알면서도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작으로부터 최후를 향해 치달아가는 글의 운명과도 같은 내 처지에 관한 덧없기 그지없는 이 한편의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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